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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미술관

소개

최북미술관 소개  
붓 끝에서 태어나다 조선후기 화단의 거장
최북

최북은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에 활동한 직업화가로서 조선의 반고흐라 불리울만큼 기이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의 일화중 금강산 구룡연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못
속으로 뛰어든 일이나, 어떤 벼슬아치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가 최북이 응하지 않자 협박하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 하면서 스스로 한 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는
일화는 최북의 기인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북미술관에는 최북의 영인본 작품60여 점을 비롯해,
일화를 볼 수 있는 영상관, 최북이 잘 그렸던 메추라기를 그려 볼 수 있는 체험장 등이 있으며, 기획전시실은
정기적인 교체전시의 기획으로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최북미술관 이미지
최북 대표작품
  • 풍설야귀인도(風雪野歸人圖)
  •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 표훈사도(表訓寺圖])
  • 서설홍청도(鼠囓紅菁圖)
  • 매하쌍치도(梅下雙雉圖)
  • 호취응토도(豪鷲凝兎圖)
  • 답설방우도(踏雪訪友圖)
  •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최북은 꽃과 풀, 새와 짐승, 바위, 고목, 메추라기와 호랑나비를 잘 그렸고,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려 '최산수'라는 별칭이 있다.
최북 소개
1. 호생관 최북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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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12~1786)은 정확하게 전하는 생몰년의 기록이 없으나 숙종 때 태어나 영조 때까지 그림을 그리다가 생을 마친 무주인茂朱人 화가였으며 여항 시인이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식埴이었고, 자는 성기聖器 또는 유용有用이었으며, 호는 성재星齋ㆍ기암箕庵ㆍ거기재居基齋ㆍ삼기재三奇齋ㆍ생은재生隱齋ㆍ좌은坐隱ㆍ월성月城ㆍ반월半月ㆍ기옹奇翁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후에 이름을 북北으로 바꾸면서, 자는 이름을 나누어 쓴 칠칠七七이라 했으며, 호는 호생관毫生館이라 했다.

최북의 성질은 불같은 성격으로 괴팍한데다 오기ㆍ고집ㆍ자만 등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 기행과 취벽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금강산 구룡연을 구경하고 즐거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천하명인 최북은 천하명산에서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외치고는 물 속에 뛰어든 일이라든가, 어느 벼슬아치가 그림을 요청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협박하자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하고는 평생을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려야 했던 이야기 등은 그의 괴팍한 성격은 물론 우리나라 회화사를 통틀어 가장 광기 있는 화가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최북은 자기가 스스로 눈을 찌른 뒤 애꾸가 되었다. 그는 한쪽 눈이 안보여 항상 반 안경을 끼고 그림과 시 공부를 하였으며 술을 좋아했고 나아가 놀기를 즐겨한 꾼이었다. 남공철南公轍(1760~1840)의 <금릉집金陵集>13권 ‘최칠칠전’에 하루 5~6되씩의 술을 마셨다 하였고 <금릉집>10권 ‘최북답’의 남공철이 최북에게 보낸 편지에 ‘술 한 동이 마시걸랑’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그는 말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고 취하면 광기와 호기를 부려 주광화사라 불리기도 했던 그는 왜 술을 마셨는가? 그의 행적으로 볼 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척박한 현실에서 세상을 깔보며 사는 촉매제로 술을 마셨으며 그림을 통해 그 고뇌를 표현했던 것은 아닌지? 이렇듯 최북은 시대의 모순과 고민을 외면하지 않고 술 그리고 그림과 시를 통해 자기의 주체성을 예술로서 표현했다.

성격이 괴팍한 최북에게 친구도 없었을 것 같지만 그를 아끼고 돌봐준 사람들은 많았다. 당대 예림의 총수라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1766년 10월 친구들과 <사노회四老會>를 결성할 때 <아집도雅集圖> 를 최북이 그려 주었고, 당시 최고의 서가였던 이광사李光師(1705~1777) 같은 학ㆍ예 겸조의 명망가들과 함께 단양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소문난 신광수申光洙(1712~1775)도 최북의 그림 <설강도雪江圖> 에 『최북설강도가崔北雪江圖歌』라는 시를 지어 주기도 했다. 또한, 서평 공자와 바둑으로 교우를 돈독히 나누었고, 순조 때 재상을 지낸 남공철은 물론 당대 최고의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李瀷(1681~1763)이 최북이 일본에 갈 적에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송별시 역시 최북을 아낀 흔적이 아닐 수 없으며, 이단전李亶佃(?~1790), 이현환李玄渙(1713~1772)과도 남다른 우정을 나누었다.

최북은 1748년 2월에 부산포를 떠나 그 해 윤7월까지 화원인 이성린李聖麟(1718~1777)과 함께 통신사를 따리 일본에 다녀왔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이성린이 일본에서 그린 <산수도> 의 화풍과 제작 연대의 동시성, 조선국의 표시, 규격과 전래된 곳이 같은 비단에 담채로 큰 횡축으로 그린 <산거도山居圖> 작품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고, 이익의 송별시와 이현환이 지은 <섬와잡저蟾窩雜著>‘송최칠칠일본서送崔七七日本序’에서 최북이 일본에 갔었다는 것을 희미하게 말해주고 있다.

또한 중국을 다녀 온 사실을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신광하申光河(1729~1796)가 지은 <최북가(崔北歌)>의 시에 숙신을 다녀왔다고 하였고, 최북이 지은 <독작獨酌>시에 동쪽 달을 바라보고 고향을 생각한다는 글이 있어 중국에도 다녀오지 않았나 추정하고 싶다.

최북은 <서상기>와 <수호전>을 즐겨 읽었다. <수호전>은 영웅호걸들이 나쁜 벼슬아치들을 의리, 용기, 무예, 지혜로써 혼내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므로 조선에 처음 유입된 이후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로 지목된 바 있다. 이를 보면 최북은 <수호지>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었고 당시의 현실사회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최북이 18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중인 문사들의 모임이었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일원인 천수경千壽慶(?~1818), 중인 신분의 장혼張混(1759~1828) 등과 어울린 사실과 <풍요속선風謠續選>에 채록되어 실려 전하는 그의 시 『추회秋懷』ㆍ『야유랑冶遊郞』ㆍ『독작獨酌』의 세 편의 시를 보면 시문에도 능한 중인의 기걸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예에도 능했던 사실은 남공철의 <금릉집>이나 이규상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화주록畵廚錄’편에 그는 광초를 즐겨 썼으며 초서와 반행의 서채가 특히 아름다우면서 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그의 그림 <공산무인도公山無人圖> 의 화제 ‘공산무인公山無人 수류화개水流花開’ 초서로 쓴 글씨를 보면 그의 솜씨를 짐작케 할 수 있다.

최북의 출생을 1712년으로 보는 설, 1720년과 1738년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 1712년 출생의 근거는 이가환李家煥(1742~1801)의 저서로 추정되는 <동패낙송東稗洛誦>에서 알 수 있으며, 죽음도 49세로 보는 설과 예순(1786)을 넘었다고 보는 설이 있는데 49세로 보는 설은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 찾을 수 있고, 예순이 넘었따고 보는 근거는 신광화가 최북의 죽음을 애도한 조시 『최북가』가 정조10년(1786)이고 최북의 유작의 하나인 <송음관폭도> 가 영조41년(1765) 제작된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최북의 생존시기는 1712년에서 1786년 사이로 75세의 생을 살아왔음을 알 수가 있다.

본관이 어디냐에 대해 경주慶州 최씨의 후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무주戊朱 최씨라는 설이 있다. 무주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을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무주인이라는 기록은 조병유趙秉瑜의 <적성지赤城誌>, 장지연張志淵(1864~1921)의 <진휘속고震彙續考>와 <일사유사逸士遺事>,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최완수의 <화가약전>등 여러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최북이 경주 최씨의 후손이었으나 무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기질대로 무주 최씨로 자칭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가계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나 집안도 중인인 산원으로 보는 설과 어머니가 기생으로 서자로 태어났다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이가환의 <동패낙송>에 그의 아버지 상여가 계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인신분이었으나 서출이 된 출신임을 생각할 수 있다.

어디에서 죽었느냐 에도 <금릉집>에는 ‘서울여곤에서 죽었는데 그 해가 어느 해인지 알 수 없다.’하였으며, 신광하의 『최북가』에 ‘성 모퉁이에서 쓰러져 눈 속에서 죽었다.’고 언급되었을 뿐 자세히 전하는 기록은 없다.

최북은 최산수崔山水ㆍ최수리<崔鶉>ㆍ최묘崔猫란 별명에서 보듯이 산수화는 물론 인물, 화훼, 영모, 괴석 등 여러 분야에서 대담하고 파격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보인 하가였다. 최북의 전하는 작품은 약 80여종이 넘는데 현재 서울에 있는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추경산수도> ,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각산수도> ,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강조어도> , 호암미술관 등에 몇 점만이 소장되어 있을 뿐 대부분 개인들이 보관하고 있으며 1757년에 그린 <추경산수도> 는 보기 드문 걸작으로 꼽고 있다.

2. 최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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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의 생존 시기를 1712년에서 1786년으로 볼 때 그 시기에 간행된 문헌은 없고 조선 후기 호남의 실학자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유고집 <이재난고 頤齋亂藁>에서 살아 있을 때의 기록을 살펴 볼 수 있고 그 외는 최북이 죽은 후의 기록들이다.

최북이 죽은 지 10년 뒤 1797년 천수경 등이 편찬한 위항 시집인 <풍요속선>에 최북이 지었다는 시 3수가 채록 수록되어 있고, 남공철이 1788년 편집하여 1815년 간행한 시문집인 <금릉집>에는 최북의 기행과 일화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1797년 편집된 이규상의 문집인 <병세재언록>과 이가환의 저서로 추정되는 1800년경 편집된 <동패낙송>에도 최북을 접할 수 있으며, 조희룡이 엮어 1844년 탈고된 인물 전기집인 <호산외사>, 신광하의 문집인 <진택문집>, 이 밖에 1862년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편집 간행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1866년 이경민李慶民(1814~1883)이 편집 간행한 <희조질사熙朝軼事>, 1898년 조병유가 편찬한 무주군 읍지인 <적성지>, 1917년 오세창이 편집한 <근역서화징>, 1926년 강효석이 편찬하여 한양서원에서 발간한 <대동기문>등이 있다. 남공철의 <금릉집>중 ‘최북답’과 ‘최칠칠전’은 최북의 기행을 알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이며, <이향견문록>과 <적성지>ㆍ<근역서화징>ㆍ<희조질사>ㆍ<일사유사>ㆍ<대동기문>등은 <금릉집>을 근간根幹으로 하였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은 <금릉집>ㆍ<호산외사>ㆍ<초산잡저>ㆍ<풍요곡선>ㆍ<고화비고>등에서 발췌 편집하여 최북의 행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문헌 중의 하나이다.

최북에 관한 문헌들 - 문헌명, 지은이, 집필 및 발행연도, 목차명, 주요내용 등의 안내
문헌명 지은이 집필 및 발행연도 목차명 주요내용
귀은당집 남공철 미상 ‘崔七七傳’ 金陵集
근역서화징 어세창 1917(1928) ‘崔北’ ‘金弘道’ 金陵集, 壺山外史
금릉집 남공철 1788(1815) '崔七七傳’ ‘崔北答’ 기행
다산시문집 정약용 ‘釣龍臺’ 醫龍圖
대동기문 강효석 1926 ‘崔北稱崔直長’ 金陵集
동패낙송 이가환 1800경 ‘崔北’ 출생
병세재언록 이규상 1797추정 ‘畵廚錄’
섬와잡저 이현환 미상 ‘送崔七七日本序’ ‘崔北畵設’ 일본지행,기행
성호전집 이익 송별시 일본지행
숭문연방집 신석초 1973 ‘崔北雪江圖歌’ 생애
이재난고 황윤석 1771 ‘頤齋亂藁 第三冊’ 근세(崔北)화가 평가
이향견문록 유재건 1866 ‘崔毫生館北’ 기행
적성지 조병유 1898 ‘逸史補遺’ 무주인
진택문집 신광하 ‘崔北歌’ 사망
진휘속고 장지연 미상 자호,무주인
청장관전서 이덕무 ‘對杖精鍊’ 지두화
풍요속선 천수경 1797 ‘崔北’ 최북이 지은 시
호산외사 조희룡 1844 '崔北傳’ 죽음
희조질사 이경민 1866 金陵集

표 1 : 최북에 관한 문헌들

1)귀은당집[歸恩堂集]

금릉金陵 남공철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이 책 제6권 잡저에 금릉집의 ‘최칠칠전崔七七傳’이 실려 있다.

2)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1917년 오세창吳世昌이 편집하여 1928년 계명구락부에서 출판한 이 책에는 남공철이 1815년에 지은 《금릉집》, 조희룡의 《호산외사》, 신광수의 『최북설강도가』와 유최진柳最鎭의 《초산잡저樵山雜著》에 나와 있는 최북에 관한 기록을 그대로 옮겼다.

최북崔北
初名埴 字聖器 -云有用 後改名北 字七七 號星齋 -云箕庵 -云居其齋 -云三奇齎 晩稱毫生館 以毫籍生意也 戊朱人 卒年四十九.
초명은 식, 자는 성기 또는 유용, 뒤에 이름을 북으로 고치고 자는 칠칠이라고 했다. 호는 성재ㆍ기암ㆍ거기재ㆍ삼기재이고, 만년에는 호생관이라고 하였으니 붓으로써 살아간다는 뜻이다. 본관은 무주이고, 죽은 나이는 49세이다.

答崔北書曰 朝自南衕還 聞虛過悵然也 僮僕皆傳生來 時被酒
최북의 편지에 답하기를, 아침에 남쪽 동네에서 왔다가 나(申光洙)를 만나지도 않고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섭섭했다. 아이놈들이 모두 전하기를, “최생이 왔는데 그때 술에 취해서 책상 위의 책들을 마구 뽑아다가 앞에 잔득 늘어놓고는 인하여 소리를 지르며 술을 토해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나갔다.”고 하던데, 거리에 쓰러지지나 않았는지. 조자앙趙子昻(趙孟頫)의 <만마축萬馬軸>은 참으로 명품이다. 이단전이 말하기를, “비단이 아직도 생생한 채로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칠칠이 자기가 그려 놓고는 일부러 조자앙이라는 낙관을 찍어서 남을 속이려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록 칠칠이가 그렸더라도 그림이 이렇게 잘 되었은 즉 자앙이 그린 것이라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으니 반드시 진짠지 가짠지 따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어든 것이라고 하니 기것은 모두 자네가 평소에 술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라 배꼽을 부등켜 잡고 웃을 만한 일이다. 마침 술 한 병을 얻게 되면 나를 다시 찾아 주게나.
...
조자앙의 <만마도>횡축橫軸 비단폭의 발문 끝에 이르기를, 자앙이 한유韓愈의 《화기畵記》에 의거하여 이 화축畵軸을 그렸으니, 그림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고 채색이 재미스럽고 화려하게 되었다. 내가 일찍이 이 그림을 최칠칠에게서 얻었으니, 칠칠이 그림 잘 그린다고 온 나라에 이름이 나서 자주 그것을 진본眞本이라고 칭하고 그 밑에 낙관하기를 “자앙이 그리다.”라고 했다. (금릉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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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 오헌 선생傲軒先生이 바닷가에 숨어 살 적에 강표암姜豹菴(姜世晃) 등 여러 노인과 함께 결사結社하여 약관하기를 ⌜사노회四老會⌟라 하고 매양 사시四時에 한번씩 회원 집에서 모여서 돌아가면서 음식을 제공하기로 했다. 최북이 <아집도>를 그리고 표암이 시를 써서 그 운치가 멋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초산잡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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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의 <산거도山居圖>는 비단에 담채淡彩로 그린 큰 횡축橫軸이니, 낙관은 ‘무진(영조 24:1748) 6월에 조선국의 거기재 최북이 그리다.’라 하고, 쇠도장은 ‘최북’ ‘칠칠’ 두 도장과 “진광眞狂 김계승金啓升이 찬贊이라고 했다. <국화소금菊花小禽>ㆍ<묵국지墨菊紙>ㆍ<월야산수지묵月夜山水紙墨>이다.(고화비고)
김홍도(金弘道)
...
지금 단원이 홀로 긍재ㆍ호생관ㆍ고송유수관의 사이에서 혼자 마음대로 오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인품이 높아야 그림도 높다는 것이다. 긍재는 김득신이요, 호생관은 최북이요, 고송유수관은 이인문이니, 단원과 어울려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호산외사)

3)금릉집

조선 후기 순조 때 문신이며 문장가였던 금릉 남공철의 시문집이다. 이 책에 ‘최칠칠전’은 최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이다.

崔七七傳(최칠칠전)

崔北七七者 世不知其族系貫縣 破名爲字 行于時工畵 眇一目嘗帶靉靆半臨帖摹本 嗜酒喜出遊入九龍淵樂之甚飮劇醉或哭或笑已又叫號曰 天下名人崔北當死於天下名山遂翻身躍至淵旁有救者得不墮舁至山下盤石 氣喘喘臥忽起劃然長嘯響動林木間棲鶻皆磔磔飛去七七飮酒 常一日五六升 市中諸沽兒携壺至 七七輒傾其家書卷紙幣盡與取之 貲益窘遂客遊西京萊府賣畵二府人持綾綃踵門者 相續人有求爲山水 畵山不畵水 人怪詰之七七擲筆起曰 唉紙以外皆水也 畵得意而得錢少則 七七輒怒罵裂其幅不留或不得意而過輸 其直則呵呵笑拳 其人還負出門復指而笑 彼竪子不知價於是 自號毫生子七七性亢傲 不循人 一日與西平公子圍碁賭百金 七七方勝而 西平請易一子 七七遽散黑白斂手 坐曰 碁本於戲若易不已則終歲不能了一局矣 後不復與西平碁 嘗至貴人家閽者 嫌擧姓名入告崔直長至 七七怒曰 胡不稱政丞而稱直長

閽者曰何時爲政丞七七曰吾何時爲直長耶若欲借啣而顯稱我則豈可捨政丞而稱直長耶不見主人而歸七七畵日傳於世世稱崔山水然尤善花卉翎毛怪石枯木狂草(자왈하시위정승칠칠왈오하시위직장야약욕차함이현칭아칙기가사정승이칭직장야부견주인이귀칠칠화일전어세세칭최산수연우선화훼령모괴석고목광초)

戲作(작)

翛然超筆墨家意匠始余因李佃識七七嘗與七七遇山房剪燭寫澹墨竹數幅七七爲余言國家置水軍幾萬人將以備倭倭固習水戰而我俗不習水戰倭至而我不應則彼自(연초필묵가의장시여인리전식칠칠상여칠칠우산방전촉사담묵죽수폭칠칠위여언국가치수군기만인장이비왜왜고습수전이아속부습수전왜지이아부응칙피자)

渰死爾何苦三南赤子騷擾爲復取酒打話(사이하고삼남적자소요위복취주타화)

窻至曙世以七七爲酒客爲畵史甚者目以狂生然其言時有妙悟實用者類此李佃言七七好讀西廂記(지서세이칠칠위주객위화사심자목이광생연기언시유묘오실용자류차리전언칠칠호독서상기),
水滸傳諸書爲詩亦奇古可諷而秘不出云七七死於京師旅邸不記其年壽幾何(수호전제서위시역기고가풍이비부출운칠칠사어경사려저부기기년수기하)

최북 칠칠은 족계와 고향이 어느 곳인지 알 수 없고 자는 이름 북자를 파자한 것이다. 그는 한쪽 눈이 안보여 항상 반 돋보기를 끼고 그림 공부를 하였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나아가 놀기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금강산의 구룡연에서 놀다가 술이 심하게 취하여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는 말이 ‘최북은 천하의 명인이니 천하의 명산에서 죽겠노라’하고는 물 속으로 몸을 날려 뛰었다. 그때 근반에 있던 사람들이 물 속에 뛰어들어 그를 구한 다음 못 아래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헐덕헐덕 거리며 엎드려 있던 그가 기운을 차리더니 갑자기 일어나 온 산이 울리도록 큰 소리를 지르니 이에 수림 속에 살던 산비둘기가 모두 날개를 치며 날아가 버렸다. 최북은 매일 술을 마셨는데 하루에 주량이 5~6되 정도였으며 술은 시장의 말 잘하는 어린 술장수에서 사 마셨다. 최북은 번번히 화첩ㆍ종이ㆍ비단 등을 팔아서 술을 마련했기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다. 최북은 살림이 궁해지자 마침내 나그네가 되어 평양ㆍ동래 등지로 돌아다니며 그림을 팔고 다녔는데 두 고을 사람들은 그림을 얻고자 비단을 가지고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어떤 정승이 최북에게 산수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산만 그리고 물을 그리지 않고 주었더니 그림을 부탁한 사람이 괴이하다고 힐난하니 최북은 붓을 던지며 벌떡 일어나 하는 말이 ‘이 종이의 여백은 모두 물이다’라며 한탄하였다. 또한, 자기 마음에 흡족하게 그려진 그림인데도 대금을 적게 내놓으면 최북은 화를 벌꺽 내면서 그림을 찢어 버렸다. 혹은 잘 그리지도 못했는데 대금이 너무 많다 싶으면 껄껄 웃으며 꾸짖으며 그 대금을 돌려주면서 대문을 나가는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저 사람은 대금의 고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에 최북은 붓끝으로 사는 사람이라 하여 자호를 호생관이라 했다. 최북은 성격이 뻣뻣하고 오만하여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따. 하루는 서평 공자가 한 수만 물리자고 청하자 최북은 바둑판을 휘저어 버리고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바둑이란 본디 오락인데 자꾸 물린다면 1년에 한판도 못 두게 됩니다.”라고 했다. 그 후로 최북은 서평과 바둑을 두지 않았다. 한번은 일찍이 어떤 귀인의 집을 찾아 갔는데 문지기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멋쩍었던지 들어가 “최직장이 왔습니다.”라고 고했다. 칠칠이 화를 벌컥내며 “어째서 정승이라고 하지 않고 직장이라고 하느냐?”고 꾸짖으니 문지기가 하는 말이 “언제 정승이 되셨소?”라 했다. 최북이 말하길 “그럼 내 언제 직장 벼슬을 했느냐? 직함을 빌어 나를 높여 부른다면 왜 정승이라 하지 않고 직장이라 한단 말이냐?”고 했다. 최북은 주인을 만나지 않고 돌아와 버렸다. 최북의 그림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최북을 최산수라고 불렀다. 그 후 그의 솜씨가 더욱 좋아져 꽃과 풀, 새와 짐승, 바위, 고목을 잘 그렸고 부드럽게 흘리어 장난삼아 쓴 서체는 느긋하고 유연하여 필묵가로서 경지를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처음 이단전의 소개로 최북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최북을 우연히 산방에서 만나 촛불의 심지를 잘라가며 담묵으로 대나무 몇 폭을 그린 적이 있었다. 이때 최북이 이런 말을 했다. “나라에서 수군을 몇 만명씩 두는 것은 장차 왜놈에게 대비하자는 것인데 왜놈들은 원래 수전에 익숙하고 우리네 습속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하지요. 왜놈들이 오더라도 우리가 응전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비구름이 몰려오면 저절로 죽을 터인데 어인 까닭으로 삼남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어 떠들어서 수다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말을 마치고 다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아침이 훤히 밝아왔다. 세상 사람들은 최북을 가르켜 주객이라고도 하고 화가라고도 했으며 심한 자는 심한 자는 미치광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깊은 깨달음이 있는 쓸모 있는 말이 있었다. 이단전의 말에 의하면 최북은 글읽기를 좋아했는데 서상기, 수호전을 즐겨 읽었으며 시 역시 기이하고 옛스러워 외워 볼만하나 감추어 놓고 내놓지 않았따. 최북은 경성 여관에서 죽었는데 몇 살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금릉金陵 남공철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이 책 제6권 잡저에 금릉집의 ‘최칠칠전崔七七傳’이 실려 있다.

4)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다산시문집》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전집이다. 이 시에 최북이 그린 <의룡도醫龍圖>를 보고 지은 조룡대釣龍臺의 시가 실려 있다.

조룡대(釣龍臺)
龍臺釣龍事荒怪 / 조룡대서 용 낚은 일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我初見之崔北畫 / 최북의 그림에서 내 처음 보았었지
有一猛將貌猙獰 / 모양조차 사나운 용맹한 장수 하나
怒髥如戟目裂眥 / 창끝같이 성난 수염 찢어진 눈초리로
鐵索蜿蜒繞右肘 / 오른팔에 쇠줄 감아 힘차게 끌어올리니
白馬流血龍口罣 / 피 흘리는 백마 먹이 용의 목에 걸리어
龍口呿張龍頸蹙 / 떡 벌어진 주둥이에 움츠러든 목이로세
鬐鬣擊水波四洒 / 갈기로 강물 치자 물결 사방에 뿌려져
甲光炫燿照金鱗 / 번쩍이는 갑옷빛 황금 비늘 반사되고
黑雲滿天天宇隘 / 하늘 가득한 먹구름 우주가 비좁았네
道是大唐蘇定方 / 그 그림은 다름 아닌 당 나라 소정방이
屠龍渡師扶山砦 / 부소산성 용을 잡고 군사 건넨 광경일레
扶山之下江水流 / 부소산 아래 흐르는 강물이라 그 가운데
蓋有拳石如浮漚 / 거품처럼 떠 있는 주먹만한 바위 하나
當時千艘泊南岸 / 그 당시 천 척 전선 남쪽 기슭 닿았거늘
如何路由西北陬 / 어이하여 서북쪽의 길을 잡아 나왔으며
龍旣噓雲顯靈詭 / 그 용 이미 구름 불어 신령함을 보였다면
詎又冥頑仰呑釣 / 어찌 또 미련하게 낚싯바늘 삼켰는고
石面谽谺深沒趾 / 움푹 파인 돌 표면 발꿈치가 빠질 정도
好說靴痕至今留 / 대장의 신발 자국 지금껏 남아있다나
載籍荒疏五千歲 / 오천년 전 문헌들 허술하기 그지없어
壺孩馬卵都謬悠 / 호해 마란 모두가 잘못된 전설이여
爲善無芳惡無臭 / 선한 일에 향기 없고 악한 일에 악취 없어
小人恣睢君子愁 / 소인배는 방자하고 군자는 걱정을 하네.

5)대동기문大東奇聞

《대동기문》은 조선조 역대 인물들의 전기ㆍ일화들을 뽑아 엮은 책으로 1926년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하고 윤영구尹甯求와 이종일 李鍾一이 교정하여 한양서원漢陽書院에서 처음 간행하였다. 이 책에 《금릉집》에서 발췌한 ‘최북칭최직장崔北稱崔直長’의 기록이 있다.

6)동패낙송東稗洛誦

이가환李家煥의 저서로 추정되는 《동패낙송》의 ‘최북’에는 출생과 가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실려 있다.

최북崔北
...
최북의 자는 칠칠이다. 초명은 식이고 자는 성기이다. 경주인으로 숙종 임진년(1712) 출생하였다. 계사 상여의 아들이다. 화폭에 제할 때 성재, 삼기재, 좌은, 호생관이라 하였다.

7)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

이규상李奎象이 1797년 집필한 것으로 추정하는 『병세재언록』 ‘화주록畵廚錄’에는 최북의 화법을 알 수있는 기록이다.

화주록畵廚錄
...
최북은 자가 칠칠이며 호는 호생관 또는 삼기재이다. 한미한 가문출신으로 혹은 경성의 여항인이라고도 한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는데, 화법이 근력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가느다란 필획으로 대강 그림을 그려도 갈고리 모양이 아님이 없었따. 이 때문에 자못 거칠고 사나운 분위기를 풍기었다. 특히 메추라기를 잘 그려서 사람들은 그를 ‘최메추라기(崔鶉)’라고 불렀다. 일찍이 호랑나비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보통나비와는 달랐다.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깊은 산속 궁벽한 골짜기의 사람이 닿지 않는 곳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나비들이 있다.‘고 했다. 또한 그는 초서를 잘 썼는데, 반행의 서체는 완준기절 하였다. 그는 성품이 칼끝이나 불꽃같아서 조금이라도 뜻에 어긋나면 곧 욕을 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못쓸 독이어서 고칠 수 없다고 지목하였다. 늘그막에는 남의 집에서 기식하다가 죽었다.

8)섬와잡저蟾窩雜著

이현환李玄煥의 문예와 인물에 대한 기록으로 최북에 관한 기록은 ‘송최칠칠일본서送崔七七日本序’ ‘최북화설崔北畵說’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최북의 일본지행과 화풍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9)성호전집星湖全集

성호 이익은 최북의 일본행을 송별하면서 3수의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중 마지막 시는 다음과 같다.

/ 옹졸하고 게으른 나는 평생 장관을 못 봤건만
/ 그대는 바다 건너 하늘 밖을 노닐게 되었구나.
/ 해 뜨는 동쪽에는 진짜 해가 있을 지니
/ 그것을 그려 가져와 내게도 보여 다오.

10)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

석북집石北集은 조선 영조 때의 문인 신광수의 시문집이다. 1973년 신석초申石艸가 《자하시집紫霞詩集》과 합본으로 《석북시집石北詩集》을 초역, 간행하였다. 석북石北 신광수가 계미년(1763) 지은 『최북설강도가崔北雪江圖歌』는 최북의 일생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시다.

최북설강도가崔北雪江圖歌
/ 장안 시장에서 그림을 파는 최북을 보소
/ 다 쓰러진 초가집에 네 벽에서 찬바람이 나는 곳에 사는구나
/ 종일 문을 닫고 산수를 그리는 방안을 보니
/ 유리안경 나무필통만 놓여져 있구나
/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 끼니 떼우고
/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 끼니 떼운다
/ 찬 겨울날 떨어진 방석 위에 손님을 앉혀 놓고
/ 문밖 작은 다리에 눈이 세 치나 쌓였구나
/ 여보게 자네
/ 내가 올 때 청강도나 그려주게
/ 별의 아름다움과 냇가에 비친 달에 발을 저는 당나귀는 걷고
/ 남북 청산이 온통 허연 은빛이로구나
/ 어부의 집에 눈에 눌려 찌그러지고 외로운 낚싯배 한잎 두잎 떴다
/ 어찌 파교 고산 풍설속에
/ 부질없이 맹처사 임처사만 그릴 건가
/ 달리 불러 도화물에 떠
/ 눈 그림 종이에 다시 봄날을 그려보게

11)이재난고頤齋亂藁

《이재난고》는 조선 후기 호남의 실학자인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유고집이다. 이 책에 당시 화가를 평하기를 심사정沈師正, 정선鄭敾, 최북崔北, 강세황姜世晃을 꼽고 있다. 이 기록은 최근에 수집한 자료로 국역하지 못하고 원문을 그대로 싣는다.

12)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조선 철종哲宗 때 유재건劉在建이 지은 인물 행적기이다. 이 책에 ‘최호생관북崔毫生館北’의 기록은 《금릉집》과 같다.

13)적성지赤城誌

1898년 무주군수 조병유趙秉瑜가 편찬한 무주군 읍지이다. 《적성지》 ‘일사보유’ 편에 남공철의 《금릉집》을 옮겨 게재한 기록이 있다.

일사보유逸史補遺
...
최북은 숙종 때 사람으로 기록은 경성도서관에서 나왔따. 초명은 식이었고, 자는 성기 또는 유용이며, 후에 개명한 이름을 북, 자는 칠칠이라 하였다. 북자는 쪽으로도 칠, 오른쪽으로도 칠이다. 호는 성재 또는 기암, 기재라고도 하였으며 늦게는 호생이라 불렀으니 그것은 붓 털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무주사람으로 49세에 죽었다.

14)진택문집震澤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신광하申光河의 시문집으로 12권 6책 필사본이다. 이 책에는 최북이 죽었을 때 쓴 조시 ‘최북가崔北歌’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애도시는 정조 10년(1786)에 최북의 사망한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글이다.

최북가崔北歌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서 죽은 최북
/ 가죽옷에 백마 탄 이는 뉘 집 자식이더냐
/ 그대들은 어찌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아니하는가
/ 최북이는 비천하고 미미했으나 참으로 애달프도다
/ 최북이는 사람됨이 참으로 굳세었다
/ 스스로 말하기를 붓으로 먹고사는 화사畵師라 했다네
/ 작달막한 키에 애꾸눈이지만
/ 술 석잔 들어가면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네
/ 북으로 숙신까지 들어가 흑룡강에 이르렀고
/ 동쪽으로는 적안을 지나 일본에 갔었따네
/ 귀한 집 병풍의 산수도는
/ 안견安堅과 이징李澄을 쓸어 버렸네
/ 술을 찾아 미친 듯 노래하며 붓을 휘두를 적엔
/ 큰 집 대낮에 산수 풍경이 생겼다네
/ 열흘을 굶어 그림 한 폭 팔아서
/ 취하여 돌아오다 성 모퉁이에서 쓰러졌네
/ 북망산 흙 속에 묻힌 만인골에게 묻나닌
/ 어찌하여 최북이는 삼장눈 속에 묻혔단 말인가
/ 오호라
/ 최북이는 몸은 비록 얼어 죽었어도
/ 그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15)진휘속고震彙續攷

장지연이 쓴 책으로 이 책에서 최북의 자호와 무주인임을 알 수 있다.
...
최북의 자는 칠칠이며 호는 호생관 또는 삼기재, 성재, 기암이며 무주인이다.

16)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대장정련對仗精鍊’ 시에 최북이 지두화를 그린 기록이 있다.

대장정련對仗精鍊
/ 벽에는 최북의 지두화가 보이고
/ 책상엔 태서의 면각도가 있구나.

17)풍요속선風謠續選

정조21년(1797) 천수경千壽慶 등이 편찬한 위항시집이다. 이 책에 최북의 시 3수가 실려 있는데 ‘추회秋懷’는 최북이 천수경의 집에서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를 그리고 그 그림을 보고 지은 시이며, ‘야유랑冶游郞’은 오언절구의 시로 소재와 시상의 독특함을 보여준다.

최북崔北
...
최북의 초명은 식이며 자는 성기이다. 늙어서 이름은 북, 자는 칠칠, 호는 호생관 또는 삼기재라 하였다. 성격은 기이하고 괴팍했으며 그림은 절세였다.
추회秋懷
/ 백록 성가에 해는 비끼었는데
/ 누렇게 물든 나무 숲속에 내 집이 있고
/ 금년 팔월은 서리가 빨라
/ 울타리 국화는 아마 빨리 피겠네.
야유랑冶游郞
/ 백마타고 다리 앞에 서니
/ 봄바람에 복숭아 꽃이 떨어지네
/ 동맥사에 채찍을 휘두르니
/ 어느 곳에 창녀의 집이 있느뇨?
독작獨酌
/ 한조각 동주의 달은
/ 응당 고국에도 밝게 비치겠네
/ 몇 년 동안 객이 되어 있는가
/ 가절에도 매년 근심만 생기네
/ 눈이 개니, 온통 수풀마저 깨끗해지고
/ 구름은 골짜기에서 피어 오르네
/ 봄바람에 관주는 푸르다
/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내 정을 맡기노니.

18)호산외사壺山外史

조선 후기의 문인이며 화가였던 조희룡趙熙龍이 엮은 인물전기집이다. 이 책에 ‘최북전’은 죽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최북전崔北傳
...
최북의 자字는 칠칠이니 자字 또한 기이하다. 산ㆍ물ㆍ집ㆍ나무를 잘 그렸는데 그림의 뜻이 푸르고 무성하였다. 향을 피워 놓고 깊은 구상에 잠기곤 하여 마침내 자기의 뜻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스스로 호를 호생관이라고 하였다. 사람됨이 격앙하고 오만하며 작은 절도에 스스로 구속되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어느 집에서 달관을 만났는데 달관이 최북을 가리키며 주인에게 향하여 ‘저기 앉은 자의성이 누군가?’하였다. 최북이 낯을 들어 달관을 보며 말하기를, “먼저 묻노니 그대의 성은 누구인가?”라고 하였다. 그의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구룡연에 이르러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니 만족하다.”하고 못에 뛰어 들어 거의 구하지 못할 뻔하였다. 한 귀인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니 장차 그를 위협하려 하였다. 최북이 성내어 말하기를,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하고 드디어 한쪽 눈을 찔러서 실명(失明)하게 하였다. 늙어서는 돋보기 안경 한 쪽만을 낄 뿐이었다. 49세에 졸하니 사람들이 칠칠이의 참讖이라고 하였다. 호산거사는 말한다. “북풍이 맵구나 왕문의 광대가 되지 않았으니 족한 것인데 어째서 스스로 괴롭힘이 이와 같은가.”

19)희조일사熙朝軼事

고종3년(1866) 이경민李慶民이 인조조 인후의 여러 학자들의 문집에서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효우충의로서 이름이 있는 자의 기록을 뽑아 엮은 역사책이다. 《금릉집》등 31종이 실려 있다.

문헌을 통해 알수 있는 점들

1) 생졸生卒의 비밀

최북의 출생과 사망에 대하여는 《동패낙송》에서 ‘숙묘 임진생 출생으로 기록되어 있어 1712년 최북이 태어났음을 알 수 있고 다른 문헌에는 출생의 기록은 없다. 사망은 《호산외사》에 ’사년사십구‘ 라 기록되어 있고 《금릉집》에는 ’경성 여관에서 죽었는데 몇 살에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였고 《병세재언록》’화주록‘에는 ’늘 그막에 남의 집에서 기식하다 죽엇다‘ 고 기록되어 있다.
최북의 생존시기는 출생연도와 사망연도에 따라 달라질수 있는데 1712년에 태어나 49세로 사망했다면 1712에서 1760년이 되고 1720년에 태어나 49세에 죽었다면 1768년이 되며 1738년에 태어나 49세에 사망했다면 1738년에서 1786년이 된다. 또한, 1712년에 태어나 예순이 넘어 사망했다면 1712년에서 1786년 사이가 되는데 근래에 와서 이학설을 주장하는 학자가 많다.

2)관명冠名· 자字· 호號

최북의 관명과 자·호를 살펴보면 초명은 식植이었으나 만년에 북北이라 개명하였고, 자는 성기性器·유용有用이었으나 후에 칠칠七七이라 하였으며, 호는 성재星齋 · 기암箕庵 · 거기재居其齋 · 좌은坐隱 · 삼기재三奇齋의 호를 사용하다 호생관으로 바꾸어 사용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관명, 자, 호 - 문헌명, 이름, 자, 호 등의 안내
문헌명 이름
근여서화징
금릉집
동패낙송
병세재언록
이재난고
적성지
진휘속고
풍요속선
호산외사

위 표에서 《금릉집》의 기암箕庵과 《진휘속고》의기암箕庵이 다른것은 필사할 때 오기되지 않았나 생각되며 《금릉집》의 거기재居其齋와 《적성지》의 기재其齋가 다른점은 필사시 거居자가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3) 최북의 본관本貫과 가계家系

본관本貫과 가계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으나 본관이 경주인慶州人과 무주인戊州人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경주인은 최북의 〈도담도〉의 이광사의 제발과 이가환읜 《동패낙송》에서 무주인은 장지연의 《진휘속고》, 조병유의 《적성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최완수의 《화가약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살펴볼때 최북이 경주최씨의 후손이었으나 무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무주 최씨로 자칭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집안도 대부분 알지 못한다 기록하고 있고 이규상의 《병세재언록》에는 한미한 가문 혹은 서울 여항인의 기록과, 이가환의 《동패낙송》에서 그의 아버지 상여尙餘가 계사計士 (당시 중인의 직급에 해당)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인신분中人身分이었으나 한미한 집안 출신임을 생각할 수 있다.

최북의 본관 - 문헌명, 본관, 집안 등의 안내
문헌명 본관 집안
근여서화징
금릉집 알지못함 알지못함
동패낙송
병세재언록 한미한 가문 혹의 서울 여하인
이재난고 경성 여하인
적성지 알지못함
진휘속고

4)최북의 용모容貌

최북의 용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없으나 기록을 정리하다 보면 체구는 작고 볼품없었음을 알 수 있다.

최북의 용모 - 문헌명, 성격 등의 안내
문헌명 성격
금릉집 한쪽 눈이 안보여 항상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진택문집(최북가) 작달만한 키에 애꾸눈이지만

5) 최북의 성격性格

최북의 성격은 칼끝이나 불같은 성격으로 괴팍한데다, 오기傲氣 · 기개氣槪 · 고집固執 · 자만自慢 등으로 똘똘 뭉쳐져 있어 고집이 세고 큰소리를 잘쳤으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격임을 엿볼수 있고 술을 좋아해 유람을 좋아한 꾼이었다.

최북의 성격 - 문헌명, 성격 등의 안내
문헌명 성격
문헌명 성격
금릉집 술을 좋아했고 나아가 놀기를 좋아하였다.
병세재언록 성품이 칼끝이나 불꽃 같았다.
호산외사 고집이 세고 큰소리를 잘쳤다.
풍요속선 성격은 기이하고 괴팍했다.
진택문지(최북가) 사람됨이 참으로 굳세었다.

6)최북의 화풍畵風

최북은 꽃과 풀 새 와 짐승 바위 고목 메추라기와 호랑나비를 잘 그렸고 특히 산수와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 ‘최순崔鶉’의 별칭이 있다.

최북의 화풍 - 문헌명, 화법, 잘 그린 그림, 별칭 등의 안내
문헌명 화법 잘 그린 그림 별칭
금릉집 먹대로 휘둘러 그려낸 그림이 보통 필묵가의 격식과는 같지 않았다. 화훼,영모,괴석,고목 최산수
병세재언록 근력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거칠고 사나운 분위기였다. 메추라기,호랑나비 최순
섬와잡저 그림또한 능사가 다 갖추었다. 산수,화훼
진택문집(최북가) 귀한집 병풍의 산수도는 안견과 이징을 쓸어 버렸네
풍요속선 그림이 세상에 뛰어났다.
호산외사 그림의 솜씨가 울울창창했다. 산수,집,나무
3. 일화에서 본 재치
자세히보기

최북은 성격이 괴팍하고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점철된 일화를 남겼다. 특히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가서는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못 속으로 뛰어든 일화와 최북이 어떤 고관을 만났는데 그 고관이 최북을 보고 성이 무어냐고 물으니 고관을 쳐다보며 너의 성이 무어냐고 되물었던 일화, 어떤 귀인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다가 최북이 응하지 않자 협박하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 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는 일화는 최북의 기인다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1)천하 명인임을 자처한 자부심

어느날 최북은 금강산 구경을 갔다. 구룡연의 경치가 도취되어 술을 진탕 마시고 심하게 취하여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는 말이 최북은 천하의 명인이니 천하의 명산에서 죽겠노라 하더니 못속으로 뛰어들었다.그 때 동행한 사람들이 황급히 물 속에 뛰어 들어 그를 구한다음 산아래 반석 위에 눕혀 놓으니 한 동안 헐떡거리며 누워 있었다. 헐떡거리던 그가 갑자기 일어나 온 산이 울리도록 큰소리를 지르니 그 소리가 숲을 울려 수림속에 살던 까마귀가 모두 날개를 치며 날아가 버렸다.

-이야기 인물 한국사 / 이이화-

어떤 사람이 산수화를 그려달라고 청하였는데,최북은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아니했다. 그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칠칠이는 붓을 더닞고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아. 종이 밖은 모두 물 아니오“라고 하였다. 그림이 잘되어 득의작인데 주는값이 적으면 문득 화를 내며 욕하고는 그 그림을 찢어 없앴다. 반대로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는데도 그림 값을 많이 주면 껄걸 웃으면서 주먹으로 그사람을 밀며 그림 값을 도로 주어 문 밖으로 내보내고는 다시 손가락질하며 ”저 녀석은 그림 값도 모르네“하고 하였다.

- 조선시대 화론 연구 / 유홍준 -

현감인 한 친구가 최북을 초대하여 동헌에 놓아둘 병품 그림을 청했다. 이에 최북이 돼지 한 마리를 현감에게 그려주자 노발대발했다. 최북은 “돼지는 누추한 우리에게 안주하고 궂은 먹이에 자작하니 그 아니 청빈하며 뜻이 서면 저돌하니 그 아니 기재가 매 우며, 만인에게 돈버는 돼지꿈을 주니 그 아니 인자한가”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 이규태-

2)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찌른 오기

어느 벼슬아치가 한 초라한 화가를 앞에 두고 꾸짖고 있었다. 내가 그림 부탁한 것이 언제인데 이제까지 붓끝 하나 놀리지 않았느냐는 둥,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토록 오만 하느냐는 둥 별별 말로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런말을 듣던 그화가는 벼락 같이 화를 내며 옆에 있던 송곳을 들고 소리쳤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깔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 버리는구나”하며 들고 있던 송곳으로 한쪽 눈을 서슴없이 찔렀다. 이에 눈에서 피가 철철 흐르자, 그벼슬아치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래서 그는 눈 한쪽이 멀어 늘 한쪽 눈에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고, 세상 사람들은 이같은 행동을 보고 광생狂生이라 지목하였다.

-이야기 인물 한국사 / 이이화-

어느날 최북은 어느 귀인 집을 어슬렁거리며 찾아 들었다. 그 집 하인은 최북의 이름을 제멋대로 부르기가 송구했던지 안으로 들어가 상전에세 ‘최직장이 왔습니다’라고 여쭈었다. 직장은 낮은 벼슬아치의 이름이다. 이에 최북은 “너는 어찌 나를 최정승이라 부르지 않고 최직징이라 부르느냐?” 하며 꾸짖었다. 이 말은 들은 하인이 웃으며 말했다. “언제 정승이 되었나요?” 그럼내가 언제 직장이 되었더냐? 헛 벼슬을 부를 바에야 정승이라 부르지 않고 겨우 직장위냐?“ 최북은 하인을 호통치고는 주인도 만나지 않고 휑하니 대문을 나가버렸다. 이일화도 범상히 보아 넘길거리가 아니다.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오기가 발산된 것이다.

-이야기 인물 한국사 / 이이화-

어느 재상집에서 그림을 그려 펼쳐 보였다. 그림을 구경하던 재상의 자식들이 “우리는 그림의 내용을 모르겠네”하고 말하니 최북은 발끈해서 “그림을 모르는데 그러면 다른 것을 안단 말이냐?”고 쏘아 붙였다. 거들먹거리는 재상 자식들의 무식함을 나무란 것이다.

-이야기 인물 한국사 / 이이화-

어느 집에서 높은 벼슬아치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벼슬아치가 초라한 최북을 가르키며 말했다. “저기앉은 놈의 성이 누구인가?” 이말을 들은 최북은 낯을 똑바로 들고 노려보며 말햇다. “먼저 묻겠노니 자네의 성이 누구인가?” 최북은 뻔히 그 벼슬아치의 성을 알면서도 이렇게 대꾸했던 것이다.

-이야기 인물 한국사 / 이이화-

영조英祖 대 왕족으로 동지사冬至使겸 진하사進賀使를 지낸 서평군西平君과 하루는 백금百金을 걸고 내기바둑을 두었다. 최북이 한창 상승세를 타고 이기는 판인데 서평군이 한수 물리기를 청했다.최북은 바둑판을 쓸어버리고 손을 거두며 하는 말이 “바둑의 근본은 본내 오락인데 물리고 물려주기를 계속 한다면 일년을 두고도 한판을 못 둘 것이오”라 했다. 그후로는 서평군과는 바둑을 두지 않았다. 구질구질한 짓거리를 못마땅 한 최북의 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야기 인물 한국사 / 이이화-

왕공 귀인들이 심하게는 환쟁이로 그를 부리기도 하였다. 칠칠은 마침내 이에 염증을 내고 흰 비단을 가지고 오는 자가 있어도 문득 받기만 하고 내버려두어 궤이 차고 상자에 쌓여 어떤 것은 한 해를 묵혀도 기꺼이 붓을 들려고 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전에 문여가는 대나무를 잘 그렸는데 비단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무수히 많았따. 이에 문여가는 염증을 느끼고 그것을 땅에 던지며 욕하기를 ‘내장차 버선을 만들어 신겠다.’하고 하였다. 지금 칠칠의 산수, 화훼 그림은 문여가의 대 그림과 비슷하고 그 이름이 나란하다. 염증을 느낀듯 또한 비단을 버선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섬와잡저와 최북의 새로운 모습 / 정은진-

3)나라를 걱정하는 화가

산방山房에서 이단전李亶佃의 소개로 알게 된 남공철과 같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 수군水軍에 대한 이야기가 나왓다. “우리나라 조정에서 몇 만명의 수군을 두는 것은 바다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일진대, 바다로 오는 적은 물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수군이란 이름만 있을 뿐 물은 익히지 않는 것같소. 그럴 바엔 바다의 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우리 쪽에서 응하지 않으면 저 들은 머물러 있다가 스스로 죽고 말것인데, 무엇 때문에 삼남의 장정들을 괴롭혀서 소요를 일삼을 필요가 있겠소?”하며 남공철과 함께 새벽이 되도록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짝짓기로 배우는 세계사 / 박상진-

4) 성격을 반영한 독창성

최북이 호랑나비를 그렸다. 그런데 그 나비는 보통나비와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깊은 산속 골짜기 사람이 닿지 않는 곳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나비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18세기 조선 인물지 / 이규상-

이현환이 말하길 “그대의 그림은 성성이가 술을 좋아하여 꾸짖어도 또한 마시는 것에 가깝지 아니한가. 옛날 소식이 말하기를 ‘시에서 두보, 문에서 한유, 글씨에서는 안진경, 그림에서는 오도자를 이르러 고금의 변화가 이루어 졌으니 천하의 능사가 모두 갖추어 졌다’ 라고 했네. 내가 그대의 그림 또한 능사가 다 갖추어졌다고 평가했으니 그대는 아끼지 말게나” 하니, 칠칠은 말하기를 “오직 그림은 내 뜻에 맞게 할 뿐입니다. 세사에서 그림을 나는 자가 드뭅니다. 진실로 그대의 말과 같다면 비록 백대 후의 사람이 이그림을 보더라도 그사람됨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니 저는 뒷날 저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싶습니다.”하고 하였다.

-섬와잡저와 최북의 새로운 모습 / 정은진-

5)최북을 아끼고 돌보아준 친구들

남공철이 최북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아침에 남쪽 동네에서 왔네. 그런데 왔다가 못만나고 갔다하니 안됐네. 머슴아이들이 한결같이 말하기를 자네는 이미 술에 취해 있어서 어지럽게 내책을 꺼내 가득 흐트러 놓고는 이내 미친듯이 부르짖으며 토하려고 해서 남들이 붙들어 주고 나서야 그쳤다고 하더군. 돌아가면서 길에 넘어져 다치지나 않았는지? 조자양 《만마도》는 진실로 명품이네. 이단전이 말하기를 비단이 아직 닳지 않은 것을 보아 필시 자네가 그려 가지고 남을 속이려고 한 짓이라고 하더라도 그림이 이처럼 좋다면 조자양의 필치라 해도 해롭지 않다네. 모름지기 이 진부는 논할 것이 못되네. 그런데 이런 것을 얻어씅니 이 모두가 평소 술을 좋아한 인연으로 생긴 것이네. 또 다시 배를 두드리고 마침 술 한동이 마시걸랑 찾아오게나 .’ 이 편지는 세 가지 사실이 나온다 최북의 교유와 그림과 술 마시는 모습이다.

-호생관 최북-붓으로 먹고 살아간 칠칠이의 이야기 / 유홍준-

6)스스로 배우고 실천한 최북

최북이 일본에 가기전 이현화에게 말하길, “이임누는 국가의 명이라 의리상 진실로 감히 사양할 수 없습니다. 또 한사람이 좁은 땅덩어리에 태어나서 본 것이라고는 수백리 사이에 불과하여 높은 산과 큰 강을 오르고 바라보아절로 그마음을 넓힐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백가의책을 아무리 두루본다하더라도 고인의 진부한 자취에 불과하니 이 또한 지기를 발휘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현실에 골몰할까 염려되어 결연히 떨치고 가려 합니다. 장차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가서 천하의 기문과 장관을 보고 천지가 넓고 크다는 것을 알고 돌아오려 합니다.”하였다.

-섬와잡저와 최북의 새로운 모습 / 정은진-

최북이 바둑을 배운 것은 글방 선생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동냥질해서 배운 것인데 , 얼마 동안 집에서 그림을 그려 놓고 돌맹이를 갖다가 열심히 바둑두는 연습을 했다. 한번은 글방 선생이 손님과 바둑 두는 것을 보고 훈수를 했더니, 깜짝 놀라서 10여살도 안된 최북과 바둑을 두었는데 선생이 꼼짝없이 지고 말았다. 선생이 말하기를 “어디서 배웠느냐?”하고 물으니 “혼자 익혓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또 어찌 익혔는데 그리 잘두느냐?“하니 ”하늘에 있는 별을 보고 하늘의 질서를 바둑의 기법에 담는 연습을 했사옵니다.“하고 했다.”허 기특한 놈이로고!“하며 선생이 최북에게 호를 지어주되 성재라고 했다. 성재는 별의 자리라는 뜻이지만 우주의 철리처럼 질서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라는 뜻이기도 했다.

-거지화가 崔北 / 공석하-

7)재치와 지기를 겸비한 최북

바둑이라면 별로 져 본 일이 없는 거평 공자가 말을 걸고 바둑두기를 다시 도전하여 왔다. 최북은 시골에서 이사올 때 이사짐을 긷고 온 조랑말이 한 마리가 있었다.k 그러나 먹이가 부실하여 눈동자만 멀뚱멀뚱하고, 몸은 말이 아니게 말라 있었다. “그럽시다.”그리하여 둘이는 바둑을 다시 두었는데 최북이 막판에 가서 지고 말았다. 서평 공자는 계면쩍어 하면서 최북의 조랑말을 끌고 갔다. 그로부터 두어달 후에 최북이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걸어가자니 무엇하고 해서 서평 공자의 집에 들렀다. 서평 공자의 집은 동대문 안에 있었다. 둘이는 다시 바둑을 두었는데 최북이 불계승으로 이기었다. 그리하여 다시 살이 오른 조랑말을 타고 유유히 떠나니, 서평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속였소그려 허허허…” “하하하…이따 저녁에 또 한판 둡시다. 그때는 져 드리리라.” “애끼 이몹쓸 사람…” “하하하…” “나한테 바둑을 이겼다는 말을 밖에서는 하지 말아주소.” “그럽시다.” 최북은 혼쾌히 대답했다.

-거지화가 崔北 / 공석하-

4. 최북이 전하는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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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북이 살았던 시기는 영·정조 시대로 화풍은 명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받아 들여 독자적인 진경산수眞景山水의 화풍으로 발전시켜 나간 조선시대 회화사에 황금기를 맞이하는 시대,즉 조선에 있어서는 르네상스, 문예부흥기로 일컬어질 정도로 학문과 문화의 전 분야가 자신의 주체성을 찾으려했던 시기였다. 이시대의 화풍은 크게 겸재 정선에 의한 진경 산수와 현재 심사정의 남종화풍이 형성 되었다.

최북이 그린 그림의 간기를 살펴보면 1742년 임술壬戌년을 상한으로 하며 병술(丙戌)년인 1765년을 하한으로 하는데 대체로 20년 가까이 화필을 잡은 것을 알 수 있고 이 시기에 김홍도·이인문·김득신 등과 교유하면서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화공망의 필법을 존경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현존하는 작품에서 화풍별로 살펴보면 최북이 37세였던 1748년 조선통신사 일행을 따라 일본에서 그린 여러점의 <산수화>는 현재 심사정의 남종화 화풍인 일면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고, 반면에 그가 44세인 1755년 광생암주인 김장□에게 <금강전도>를 그려준 바 있는데, 이 작품은 최북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수용하는 변화가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최북은30대 중반이 화풍을 함께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즉 호생관의 창작 초·중기 작품에는 겸재정선의 진경산수의 영향이, 창작중기 작품은 현재 심사정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현재 전하고 있는 작품 가운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이 나타나는 작품으로는 1749년의 작품인 <도담도>·<금강전도>와 <표훈사도>가 있으며 현재 심사정의 남종화 화풍은 <산거도>·<산시청람도>·<추경산수도>·<한강조어도>등이 있다.
<도담도>와 <표훈사도>작품을 근거로 하여 우리나라의 회화사 학계에서 호생관 최북은 겸재 정선 화풍의 그림을 그린 화가로 분류하여 왔지만 최북의 작품 가운데 정선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은 공개된 것이 별로 없다. 다만, 최근에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된 <금강총도선면>과 앞서 언급한 1755년 작품인 <금강전도>가 출판물을 통하여 공개됨으로 해서 최북이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에 따라 그린 작품이 일부 확인하게 되었으며, 또한 최북이 정선의 <봉래선경전도>를 충실히 이모移模한 <금강전도>횡축본이 지난 1997년 9월경에 해외로부터 유입되어 개인에 소장되어 있다.
이 최북작 <금강전도>는 ‘겸옹화필의금강전도慊翁畫筆意金剛全圖’라는 제호를 쓰고 있어 이는 최북이 한때 정선의 진경 산수를 따라 배웠음을 직접적으로 입증하여 주는데, 실제로 이작품을 살펴 보면 정선이 60대 중반에 구사한 진경산수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진경산수는 조선시대 후기(1700~1850)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금강산을 비롯한 전국의 명승지를 실제로 찾아가서 스케치를 하거나 또는 기억을 되살려 인상 깊은 부분을 과장해서 그렸던 소재를 우리나라 산천에서 찾은점, 실제 경치를 그리는데 따른 독특한 기법의 창안 및 중국의 화법과 확연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하여 한국의 고유색이 두드러진 점에서 크게 중시되었다. 진경산수에 대하여 최북은 ‘무릇 중국 사람들의 풍속이 다르고 조선 사람들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의 형세도 중국과 조선이 서로 다른데, 사람들은 모두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좋아하고 숭상하면서 조선의 산수를 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 까지 이야기 하지만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그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당시 조선의 화가들은 산수화라고 하면서 조선에는 있지도 않은 산천을 그렸다. 깍아지를 듯 뾰죽뾰죽한 산봉우리, 계곡을 급히 흘러내리는 폭포수 이는 우리의 산천이 아니었다. 우리의 산천은 완만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산, 계곡을 노래하듯 흘러내리는 물이었다. 당시의 화가들이 그린 산천은 중국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중국의 소주나 계림의 산천이 었다. 그것도 자신들이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중국 산수화 화첩을 보고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그린 이의 창조적 정신이나 개성이 들어있지 않은 모방화요, 현실과 전혀 들어맞지 않는 상상화였다. 그런 조선의 한심스러운 화풍을 깨뜨린 이가 바로 호생관 최북이다.

최북은 조선의 산과 계곡을 직접 찾아다니며 산천을 화폭에 담았다. 그리하여 조선의 산천이 비로소 제 모습을 찾도록 한 산수화를 그리기 위해 여러 곳을 유람한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최북이 그려 전하는 산수화 작품으로는 금강산의 〈표훈사도〉·〈금강산전도〉, 단양의 〈도담도〉, 가야산 홍류계곡의 〈산수도〉,제주의 〈해변기암도〉, 한강의 〈한강조어도〉등 여러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를 바탕으로 〈조어도〉·〈풍성야귀인도〉·〈공산무인도〉·〈수각산수도〉등의 그림에서 광기 있고 독특한 기법을 사용 자신만의 조형양식을 이룩하였다.

최북이 누구에게서 그림을 배웠는지 문헌에서는 나타난 바 없으나 그의 잔존하는 작품을 통해서 화풍을 살펴보면 그가 당대의 예림에서 이름을 빚내고 있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초기화풍의 영향을 받고 따랐음을 그의 산수화 작품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최북은 창작 초년에 정선을 예술의 사표로 삼았고, 정선의 창작 정신에 따라 그 자신도 창작을 시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좀 성급한 단언일수도 있겠으나 ㄷㄴ원 김홍도가 표암 강세황의 화론과 예술을 본받아 뒤를 따랐던 것처럼 최북은 정선의 화론과 예술을 본받아 뒤를 따랐지 않은가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최북이 겸재의 진경에 대해서 배웠다면 그 시기는 1730년대 중반이후로 여겨진다. 당시 겸재는 50대말 60댗 초기에 진경 산수의 틀을 잡아 완성해나가던 시기였다. 라서 최북의 회화에 나타나는 겸재 정선의 영향은 완성된 진경산수 보다는 한창 완성되어 나가던 정선의 진경산수의 영향이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최북의 중년이후의〈표훈사도〉를 보면 정선의 영향이 얼마간 나타나고 있으며, 아울러 현재 심사정이 즐겨 구사한 화풍이 짙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표암 강세황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비판한 적이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한편, 호생관 최북은 1712년생으로 1713년생인 표암 강세황보다도 한 살이 위이다. 그리고 최북은 이미 31세에 그린 〈금강산전도〉의 작품이 확인되고 있는 반면에 표암은 청년기 작품으로 확인되고 있는 작품이 전혀 없다. 이는 최북은 강세황보다 상당히 일찍 붓을 든 직업화가였으며 반면에 강세황은 문인화가였다.
그러면서도 최북과 강세황은 여러 차례 직·간접적으로 조우하였음이 공식 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1766년 10월 보름날 안산에서 유경종, 강세황 등이 참여한〈아집도〉를 최북이 그린 것을 볼때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즉, 강세황 작품 산수 인물의 일부에 나타나는 인물 묘사가 최북 작품 산수인물에 나타나는 인물 묘사와 매우 유사한데 최북과 강세황의 교유 사실로 미루어 볼때 이는 강세황이 최북의 인물 묘사를 본뜬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이는 강세황과 최북이 예술의 기지로서 상당히 가까웠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최북의 예술 세계를 들어다보면 은연하게 드러나느 것은 최북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현재 심사정으로 부터의 영향이다. 심사정은 정선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고 하나 심삿정이 정선의 화풍을 구사한 잔존 작품은 확인된 것이 거의 없다.이러한 현상은 겸재의 진경산수가 겸재의 50대 중반인 1730년대에 형성하여 발전되었고, 70대(1746~1755)에 이르러 더 완숙한 필치를 구사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겸재 정선의 진경사수는 그 발전 시기의 젊은 화가들보다는 한 세대를 뛰어넘어 그가 보여준 완숙기(70대) 이후의 젊은 화가들이 주도했던 화단에서 크게 풍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최북은 현재 심사정의 남종 화풍의 산수화 외에 꿩 그림과 매 그림도 심사정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최북이 그린 꿩매 그림으로는 〈매화쌍치도〉·〈설산조치도〉·〈영모도〉·〈율전쌍순도〉·〈호취응토도〉등이 있다.
최북은 산수화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라고도 불렀고, 메추리를 닮았고 수리를 잘 그린다고 해서 ‘최순崔鶉’ 이라고도 불리어 왔으며, 눈동자는 고양이처럼 날카롭고 영모를 잘그렸다고해서 ‘최묘崔描’ 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호산외사》에는 최북은 삼, 물, 집, 나무를 잘 그렸다고 소개하고 그림을 그릴적에 ‘향을 피워 놓고 깊은 구상에 잠기곤 하여 마침내 자기 뜻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사람됨이 기개가 있어서 밀쳐도 끔쩍하지 않으며 작은 절도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금릉집》 ’최칠칠전‘ 에는 최북의 산수를 심사정과 병칭하고 영모는 변묘(卞描)와 비겼다고 기록하고 잇으며, 《병세재언록》에는 ’화법이 근력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가느다란 픽획으로 대강 그림을 그려도 갈고리 모양이 아님이 없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에 두가지 타입이 있으니 하나는 생활을 통해 예술을 찾는 자요, 하나는 예술이 곧 생활이 될 수 있는 자다. 다같이 정열을 토대로 함은 다름이 없을 것이나 전자는 보다 더 이상적이요, 후자는 보다 더 감성적이라 할 수 있다. 생활을 통해 예술을 찾는 자는 고고한 예술을 산출하기 위하여 그의 생활이 점점 더 힘과 빛을 얻을 것이요, 예술이 곧 생활이 되는 자는 생활이 에술의 궤범을 떠날 수 없으므로 행동이 곧 예술이 되는 것이다. 후자에 비하여 전자는 대기적인 수확이 있기는 하나 후자에서와 같은 가장 예술적이요 높은 방향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최북은 이와 같이 생활을 통해 예술을 찾는 향기 높은 화가였다. 또한, 세상을 깔보고 살았으나 그림에는 남다른 정열과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전하는 최북의 작품은 대부분 산수화이나 화훼, 영모, 괴석도 등 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화훼화는 주로 매화, 맨드라미, 무 등을 작품의 소재로 하였고, 영모화는 용, 사슴, 소, 매, 꿩, 토끼, 메추리, 새, 게, 등을 소재로 하였으며, 괴속도는 바닷가의 기암을 소재로 하였다. 또한 〈기려행려도〉등 여러 작품에서 인물이 자주 나타나는데 화면 속의 인물 묘사보다는 산수에 비중을 두어 자연을 보여 주는데 치중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최북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의 성격과 같이 괴팍한 기질대로 대체로 치기가 있는 듯하면서도 소박하고 시정어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자신의 조형 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 아니할 수 없다.

1)그림 속의 화제畵題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
江天暮雪 / 해질 무렵의 강과 하늘의 눈

기우귀가도驥牛歸家圖
驥牛歸家 / 하루 종일 소를 몰고 돌아 왔다

풍설야귀인도風雪野歸人圖
風雪野歸人 / 눈보라 치는 날 밤 돌아온 사람

2) 그림 속의 제시題詩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
空山無人 / 빈산에 사람은 없으나
水流開花 /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

도담도島潭圖
己巳春季書于寒碧樓 / 기사년(1749) 늦은 봄에 한벽루에서 쓰고
月城崔埴有用亦興之同游而畵之 / 월성 최식 유용과 함께 놀며 그리다.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百年地僻柴門迫 / 평샹을 산간 벽지에 사니 사립문은 좁고
五月江深草閣塞 / 초여름 강물은 깊은데 초가 누각은 쓸쓸하네.

산수도山水圖
却恐是非聲到耳 / 세속의 시비 소리가 귀에 들릴까 두려워
故敎流水盡籠山 / 흐르는 물로 하여금 모두 산을 가로 막네.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起來共倚松梧影 / 자다 깨어 오동잎 그림자에 의지했노라니
夜半月湖未平 / 한밤중에 달은 밝고 밀물은 출렁이네

우첨천수도雨添春水圖
雨添春水潤 / 비온 뒤에 봄은 물기에 젖어 있고
山帶夕陽明 / 산허리에 걸린 석양은 밝게 비친다.

처사가도處士家圖
長生不老神?府 / 장생불로하는 신선이 춤추는 마을이요
搖草瓊處士家 / 풀이 춤추고 꽃이 아름다운 처사의 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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