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2024 자연특별시 무주방문의 해

대한민국

건강수도 무주

문화/역사

문화/역사 하위 메뉴

무주의 인물

문화/역사 무주의 인물  
재생
 /

김환태(金煥泰)

  • 주소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무주읍 최북로 15
  • 연락처 063-320-5636

소개

김환태(金煥泰, 1909∼1944)는 이 지역 무주 출신의 평론가다. 서른 여섯 짧은 생애였지만 1930년대 후반기 명평론가로 크게 활약하였고 우리 문학사에 뚜렷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김환태를 한국비평문학의 효시, 순수비평의 기수라 부르며 예술성을 앞세워 독자적 비평세계를 확립한 문인으로 기억한다.

창작이 비평에 우선한다고 보고, 작품은 첫 인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인상주의 비평을 내세워 문학의 독립성과 순수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눌인(訥人) 김환태. 무주면사무소 직원이었던 김종원(金鍾元)과 부인 고씨 사이에 태어나 8살에 무주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3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중학교 진학을 1년간 미룬다.
어머니가 자리에 누워 끝내 병석을 떨치지 못하고 다음해(1922년) 2월 이승을 떠나자 그해 4월 고향에서 전주로 나와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어머니를 잃은 아픔과 고향을 떠난 객지생활의 외로움도 겹쳐 2학년을 마치고는 휴학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때에 문학에의 뜻을 굳히게 된다. 이윽고 다시 진학의 길을 찾아 상경하여 열여덟이던 26년 4월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이때 보성고보에는 시인 김상용(金尙鎔)이 교사로 있었고, 상급반에는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金海卿))이 재학하고 있었다.
김환태가 ‘시인 김상용론(文章, 1939)’을 쓴 것도 우연이 아니다. 스물에 보성고보를 마치자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京都)의 동지사(同志社)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여기에서 시인 정지용(鄭芝溶)을 만나 문학적인 친교를 맺게 된다. ‘京都의 3년’에 보면 이 친교가 얼마나 도타운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김환태는 뒷날 ‘정지용론(三千里文學, 1938)’을 발표했다. 동동지사대학 예과 3년을 수료한 김환태는 복강(福岡)에 있는 구주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고등보통학교 2학년 휴학중일 때 신소설 ‘능라도’를 읽은 것이 시초가 되어 소설이나 시 읽는 일이 밥 먹기보다 즐거웠고,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문학보다 더 고귀한 학문은 없으리라는 것과 자신은 문학을 하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던 김환태는 그후 문학에서도 영문학을 생각하게 되었고, 대학의 영문과에 적을 둘 때까지 단 한번도 영문학 이외의 학과 전공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 구주제국대학은 일본인들도 들어가기 어려운 이른바 명문대학이었다.

김환태는 대학 졸업논문 ‘문예비평가로서의 매슈 아널드와 월터 페이터’에서 이 두 사람을 연결시켜 문예비평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대학노트 63쪽에 걸친 분량의 이 논문의 골자는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매슈 아널드의 문예사상 일고(1934. 8. 24∼9. 2)’와 ‘페이터의 예술관- 형식에의 통론자(1935. 3. 30∼4. 6)’ 등에 드러나 있다. 대학졸업의 해인 34년 한해 5편의 평론과 2편의 번역(평론) 등 7편을 발표하고 졸업 직후 자신의 평론으로서는 최초의 평론인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조선일보 1934. 4. 21∼22)’를 발표,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스물 여섯에 대학을 나와 여의전(女醫專)에서 몇 시간의 강의를 맡은 것 외에는 오직 집필에 전념한 김환태가 이 때 알게된 평론가 이헌구(李軒求)와의 사귐은 각별하였다.
신춘창작총평(개벽, 1935. 3월호) 문예시평- 6월의 평론(조선문단, 1935. 7월호) 1935년 조선문단 회고(사해공론, 1935. 12월호) , 을해년 문단 총관- 창작계편(학등, 1935. 12월호) 등에 김동인(金東仁)에서부터 최인준(崔仁俊)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와 작품을 평론하고 수필도 발표하는 등 필명을 날리던 김환태는 스물 여덟이 된 1936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했다.
또 이 해 약 1개월간 동대문경찰서에 수감되는데 도산 안창호(安昌浩)와의 친분관계로 왜경의 주목을 받았던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 6월 김환태는 당시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의 주재·발행자로 이름을 떨친 시인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의 누이동생인 박봉자(朴鳳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주례는 양주삼(梁柱三). 혼례식장에는 도산(島山)도 참석하였다. 박봉자는 김환태와 동갑의 나이로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마치고 ‘여성’지 등에 글도 발표한 재원이었다.
‘여성’지에 ‘어떠한 남편, 어떠한 부인을 맞이할까’에 같이 글을 발표한 인연으로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에게서 30여통의 뜨거운 구애편지를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무주에서 교편을 잡은 규수와 오빠의 후배인 청년과의 혼인은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스물 아홉에 맏아들 영진씨를 얻은 김환태는 이듬해인 40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 교사로 취직해서 2년간 근무후 서울 무학여고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는 일제가 창씨제도를 시행하여 우리 겨레의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였으며,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여 우리 겨레의 입과 눈과 귀를 막았다.
10월에는 이른바 국민총력연맹을 조직해서 황국신민화를 강요함으로써 뜻있는 문사들은 붓을 꺾지 않을 수 없었다.
김환태 또한 창씨개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金桓泰司로 개명했으며 4월 이후 붓을 꺾고 만다.
반민족적인 문학 행위를 하느니 보다는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억울한 처지의 겨레들을 돕자는 생각에 낮에는 교단에 서고 밤에는 법률서적들을 놓고서 고시준비에 열중했다.

이후 과로가 겹쳐 폐를 앓게 되고 43년 12월 폐앓이가 악화되자 무학여고를 사직하고 고향인 무주로 돌아와 요양하게 된다.
그러나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조국의 광복을 1년 앞두고 서른 여섯의 나이로 1944년 5월 26일 짧은 일생을 마쳤다.
김환태의 무덤은 무주읍 당산리 모수골 만리재에 지어졌다. 지금도 그 곳에 있고, 무덤 앞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다. 미망인 박봉자는 조국 광복의 해인 1945년 둘째 아들 영석을 잃었으나 무주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아들 영진과 딸 인자 남매를 훌륭하게 길렀다.

남매가 서울의 학교로 진학하자 박봉자도 무주에서 상경하여 만리동에서 인쇄소를 경영하다가 자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만년을 보내다가 1988년 작고했다.

김환태 작고 후 28년만인 1972년 그의 유고집인 ‘김환태전집’이 현대문학사에서 간행됐다. 문학사상사에서는 1986년 김환태문학비 건립사업을 주관하여 이 해 5월 25일 국립공원 덕유산 입구(나제통문의 무주쪽)에서 문학비를 제막했다.
그 후 문학사상사에서는 김환태를 기리는 또 하나의 사업을 해오고 있다.
그것은 1988년부터 김환태 평론문학상을 제정한 것이다.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상세이미지

닫기

찾아오시는 길